[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12월 바람
12월 바람 가을이 지나간 산 허리 두 발을 모으고 잔뜩 엎드린 겨울 당장이라도 눈을 뿌리려 멀리 계단처럼 내려오는 하늘이 가파르다 계단의 끝은 멀리 있지 않다 마지막 계단은 뒤란의 소나무 옆 낙엽을 끌어 당긴다 생의 절정을 푸른빛에 담고 춤추며 흔들리던 날의 기억 낙엽이 발에 밟힌다 그 두께만큼 시간이 쌓인다 하늘을 손 뻗어 당기는 12월 바람 걸어온 먼 길이 보인다 생의 절정, 봉긋한 봉우리마다 빈 가지, 빈 손을 하늘 향해 펴고 있다 나도 꼭 쥐었던 손을 편다 힘든 오름이 아니고 편안한 내리막이다 기차를 타고 간이역에 내리듯 삶의 여정은 낯선 곳으로 향하는 곳에서 풍경이 되고 정물이 되어 남는 것 지은이의 품 안에 마침내 안기는 것 흩어진 시간을 모으듯 낙엽을 모은다 수북히 쌓인 낙엽과 하루하루 지워지는 시간 살아간다는 것은 좋은 것이거나 나쁜 것이 아니다 단지 시작과 끝을 이어주는 만남 이어주는 만남의 진솔한 이야기일 뿐 이상하고 따뜻한 12월 지나가는 순간처럼 바람이 지나간다 올해는 12월이 되어서도 눈 한번 내리지 않았다. 몇 차례 진눈깨비 같이 흩날리다 멈췄을 뿐. 겨울의 문턱을 벌써 지났음에도 왠지 이른 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낙엽을 들추면 연둣빛 새싹이 올라오는 곳도 있다. 이상하고 따뜻한 12월이다. 뒤란의 낙엽을 모아 커다란 종이백에 담는다. 벌써 꾹꾹 눌러 담은 백이 네 봉지나되고 뒤란은 정리돼 가고 있다. 낙엽의 모양이 각각 다르듯 우리의 하루도 각각 다른 모양이었다. 순탄하게 정상을 향해 걷다가도 불현듯 거센 바람에 밀려 아래로 내동댕이 처치기도 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날이 행복한 날이라는 말에 수긍이 갈 정도로 우리 주변엔 늘 무슨 일들이 일어났다. 뒤돌아보니 걸어온 길이 보인다. 험한 길들도 보이지만 난 지금 내리막 길을 편안히 걷고 있다. 떨어진 낙엽처럼 지난 시간들이 쌓여간다. 낯설은 간이역에 내려 걸음을 내딛을 때면 호기심과 막막함이 교차한다. 하루는 그렇게 시작되었고 낙엽 떨어지듯 하루가 계단의 마지막 층이 뒤란 소나무 옆 구릉에 내려와 저물었다. 낙엽을 모으듯 흩어진 시간을 모은다. 시간들은 저마다의 색깔로 한데 어우러졌다가 따로 흩어지기도 하면서 햇살에 반짝인다. 되돌릴 수 없지만 소중한 것들. 낙엽 몇 장을 집어 책갈피에 끼운다. 후에 누군가 이 책을 펼칠 때 나를 기억해줄까? 나와 같은 생각으로 낙엽을 만질까? 흩어진 생각의 조각들이 퍼즐처럼 맞춰져 풍경이 되고 이야기가 될까? 이상한 겨울, 12월의 바람은 지난 시간을 당겨 불어오고 낙엽은 한 생의 마감을 덤덤하게 쌓아가고 있다. 이 것 아니면 저 것, 나와 같은 생각이 아니면 모두 적으로 치부하는 양분된 세상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조금은 둥글게, 너무 모나서 이웃을 찌르지 않게, 넓은 둘레를 벗어나지 않게 살면 안될까? 나무는 우리를 안쓰럽고 지긋한 눈으로 바라본다. 모난 돌이 석공의 손에서 다듬어지듯, 강의 상류에서 흘러내려온 돌이 둥글고 반짝이는 조약돌로 우리의 손에 쥐어지듯, 12월의 바람을 맞으며 우리가 지나왔던 시간의 조각들은 둥근 조약돌을 닮아야 하지 않을까? 쌓인 낙엽 위로 지난 시간을 담아본다. 지금도 내 앞을 지나치며 멀어져 가는 순간을 바라보며 나를 지으신 당신의 손길을 느낀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낙엽 위로 마지막 계단 조약돌로 우리